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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남쪽으로 튀어!’外 
 
현대문명과 거리를 둔 채, 산골에서 자급농사를 지으며 살고있는 도은님이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연재합니다. 도은님은 두 딸과 함께 쓴 “세 모녀 에코페미니스트의 좌충우돌 성장기” <없는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의 저자입니다. www.ildaro.com
 
체제의 반항아, 혹은 경계 너머의 사람들
 
마치 유행어처럼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 복지 같은 말들이 떠돌지만, 실제로 세상은 자유와 정의와는 별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종종 이런 의문에 빠지곤 한다. 세상은 왜 이런 식으로 굴러가는 것일까? 세상의 이 불의와 고통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세상의 고통과 나의 삶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인간에게는(혹은 나에게는) 이 불의와 고난을 해결할 길을 찾아낼 자유가 과연 있는 걸가?
 
나는 호기심과 불안함을 가지고서 우리 인간의 삶(혹은 내 삶)에 다가오는 행복과 고난들을 바라본다. 많은 이들의 삶이 고통스럽다면 그것의 정체와 원인을 알고 싶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정신없이 사는 것 말고 다른 삶은 없는 건지도 궁리한다. 인간 그리고 다른 존재들이 자유롭고, 여유롭고, 즐겁고, 힘차고, 조화롭고, 다채롭게 사는 길은 없는지를 열심히 상상한다. 지금 시대와는 다른 형태의 삶에 대한 비전을 열렬하게 그려보기도 한다. 시대적 한계와 공간적 제약에 갇혀있는 나를 잠시 벗어나서 경계가 넓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경계 너머를 바라보노라면, 세상에는 강인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이들은 앞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나 체제에 쉽게 순응하지 않는다. 기존 질서에 반기를 들기도 한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자유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하게 발달한 이 사람들은 자신만의 견해와 판단력을 가지고서 세상을 살아간다. 이들은 언뜻 보기에 인생 실패자, 반항아, 부적응자, 외톨이처럼 보일 때도 있다. 어쩌면 은신술(隱身術)을 발달시켜서 눈에 띄지 않는 채 은밀한 생을 살아갈 지도 모르겠다. 이 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사람들은 혁명가나 저항가, 반란가, 혹은 아나키스트들이다. 이들은 보다 정의로운 사회 변혁을 꿈꾸면서 자기 신념이나 옳다고 믿는 것에 자기 삶을 투신하고, 때로 한 시대를 풍미하기도 한다.
 
‘말썽쟁이’ 아나키스트를 통해 본 일본사회 

▲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아나키스트가 등장하는 일본 소설 <남쪽으로 튀어!>(오쿠다 히데오)  
 
입춘도 지났고 설날이 다가온다. 봄으로 가는 문을 들어선 건가? 설레며 봄바람을 기다리는 때이니만큼 오늘은 재미난 책들을 소개하고 싶다. 꽤나 흥미로운 인간들이 체제에 순응하지 않겠노라고 외치면서 자기 멋대로 나름 재미나게 행동하는 이야기들이다. 소설도 있고 희곡도 있고 에세이도 있다. 체제의 반항아들 이야기는 언제나 내 흥미를 끈다.
 
첫 번째로는 일본 소설인 <남쪽으로 튀어!>(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2006)이다. 복잡한 생각을 하게 하는 책들을 읽다가 머리를 식히려고 도서관에 꽂혀 있는 걸 집어 들었는데, 읽으면서 몇 번 웃었고 유쾌해졌다. 일본 소설을 그리 즐겨 읽는 편이 아니지만 우연히 집어 들었다가 비교적 성공한 경우다. 하여간, 과거 일본의 과격파 사회주의 운동권 출신 아버지가 이제 아나키스트가 되었단다. 근데 이 아버지가 어린 아들의 눈에는 영 민망하고 코미디 같은 말썽을 노상 부려댄다고 한다.
 
아나키스트란 본래 모든 권력과 권위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특히 국가라는 권력이 지배계층의 폭력으로부터 생겨났다고 보면서 국가 권력과 사적 소유를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진지하게 자유를 갈망하면서 신념에 헌신하거나 이상주의적 냄새가 나는 이야기로 나갈 법도 한데, 웬걸 첫 부분에서 중반까지는 이 아나키스트 아버지에 대한 조롱과 풍자가 더 많아 보였다. 물론 가볍고 귀엽게 조롱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소설이라서 작가가 맘대로 상상력을 발휘한 모양이다. 또 순전히 재미있으라고, 그러니까 진지한 것 엄청 싫어하는 독자들을 지극히 배려하면서(!) 작가가 글을 쓰지 않았나 싶은 부분도 많았다.
 
이 책은 초등 6학년 남자애의 시선으로 어른들 삶과 아이들 세상을 그린다. 1권에서는 꽉 짜인 일본의 체제, 우리한테도 익숙한 일본 학교의 분위기, 우익들이 판치는 숨 막히는 일본 사회 등을 엿볼 수 있다. 또 대도시 아이들의 소비 욕구, 우정, 가출, 불량소년들의 폭력도 나온다. 2권의 무대는 남쪽 섬인데, 이 가족이 ‘남쪽으로 튀어’서 자급자족을 꿈꾸며(꿈만 꾼다! 실제로 이 가족은 섬사람들의 무조건적인 호의에 힘입어 거의 얻어먹고 산다고 볼 수 있다) 벌이는 해프닝들이다. 여기서는 환경보호, 개발업자와 자연을 지키려는 사람들 간의 긴장과 투쟁, 신문과 TV의 맹활약,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수동적으로 대리만족을 원하는 대중 심리 등이 코믹하게 그려진다.
 
학교도 굳이 다닐 필요가 없으며, 일본 국민을 그만두고 일본 사람으로만 살겠노라는 아버지의 선언을 보자.
 
“지금부터 국민을 관두겠어. 애초부터 원했던 것도 아니니까. (...) 저희들 맘대로 국민으로 만들어놓고 이래저래 세금을 뜯어간다니까. 그러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피지배층이라는 얘기야? 정말 웃기고 있어.”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노예제도나 민권운동 같은 게 그렇지.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저 내준 것이 아니야. 누군가 나서서 싸우지 않은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 <남쪽으로 튀어>의 한 장면. 함께 이주한 남쪽 섬에서 가족들은 환경을 파괴하려는 개발업자와 대치하게 된다.
 
책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일본의 옛날이야기인 듯한 <아카하치 이야기>
 
“아카하치는 누구보다 자유를 사랑하였습니다. 힘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것을 끝까지 허락하지 않은 영혼이 지금도 저 먼 남쪽에서 바람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남쪽 나라 내 고향~’을 그리워하는 허풍장이 아나키스트를 풍자한 건가? 첫 권을 읽어가면서 든 생각이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는 ‘그래, 이런 사람을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적 아나키스트로 볼 수 있을 것 같네. 인물 묘사와 상황 설정이 정형화된 점들이 많고 심하게 과장된 경향도 보이지만, 문체도 간결하고 잘 읽히는 소설이었어. 풍요 속의 빈곤에 허덕이는 일본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 작가가 이따금씩 날선 비판을 하기도 해서 괜찮았어. 권력과 자본에 반대하는 마음이 엿보일 때도 많았고.’
 
우리 집 작은 아이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휴, 이런 말썽쟁이 아버지가 우리 가족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라고 안도했고, 나는 ‘일본 사회는 완전 대중매체 중독증 사회인가 봐. 어째 이 아나키스트조차도 TV에 나오고 신문에 실리는 걸 그렇게도 즐긴다니? 너무 웃기지 않냐?’라고 비꼬았다.
 
로마를 멸망시킨 가상의 인물 ‘로물르스 대제’
 
이어서 소개할 것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로물루스 대제”란 희곡이다. 아는 분이 읽어보라고 빌려준 <미시시피씨의 결혼>(뒤렌마트, 서문당, 1996)이란 책에 실려 있는 두 편의 희곡 중 하나이다. 뒤렌마트는 이름만 들어보았지 그동안 그의 희곡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연극으로 본 적도 없다.
 
뒤렌마트 희곡들을 읽으면서 든 느낌은, 이 작가가 참으로 체제 비판적인 사람이란 것. “미시시피씨의 결혼”과 “로물루스 대제”를 읽은 뒤 작가한테 흥미가 일어나서 몇 편 더 찾아 읽었는데, 기발하고 그로테스크한 과장과 통렬한 풍자가 가득한 작품들이었다. 패러디나 아이러니 같은 기법들도 종횡무진 발휘되어서 희곡인데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번역이 별로인 것도 있었지만.)
 
1921년에 태어나 1990년에 사망한 뒤렌마트는 스위스 태생의 독일어권 작가이다. 그는 현대 세계가 종말 직전과 같은 혼란에 처해 있다고 보는 듯하다. 세상은 부조리하고 모순에 가득 차 있으며, 자본 같은 거대한 힘들은 익명으로 은폐되어 있다. 이런 현대 세계에서는 인간의 이상인 자유, 정의, 사랑 등은 몹시 불안정한 것일 수밖에 없다. 또 인간 종족은 국가나 종교 같은 거대 조직 속에서 과학 기술 발전이라는 어리석은 신앙으로 자기 무덤을 파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개개인들이 의도적으로 행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 사람들이 체제에 속해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그 체제의 원리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까. 스스로는 잘 모르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뒤렌마트의 세계관은 세계를 구원할 수도 없고 인간을 구원할 수도 없다는 뜻인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보면, 혼돈의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희비극적으로 개개인들이 길을 찾고자 애를 쓰는 과정들이 나온다. “로물루스 대제”도 나한테는 그런 작품으로 보였다.
 
작가가 만들어낸 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대제는 로마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친다. 전쟁과 정복과 약탈로 이루어진 로마의 과거가 소름끼치게 무서웠기 때문에, 그는 로마라는 제국을, 그 끔찍한 세상을 자기 손으로 내던져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대단히 무능해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용기 있는 인물이 아닌가. 인상적인 몇몇 대사들을 내 식대로 정리해보았다.
 
로물루스: 나는 단지 정치적인 견해를 가졌기 때문에 황제가 된 것이오. (...)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내 정치적 견해요. 우리 로마 제국은 세계 제국이 되었고, 그렇게 해서 다른 나라를 희생시켜가면서 공공연한 살인, 고문, 탄압, 약탈의 기구가 된 것이오.
율리아(아내): 그러니까 당신은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나와 결혼했던 거군요. 당신은 로마를 구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고의로 사보타주를 했던 거군요.
레아(딸): 조국의 멸망을 모른 척 할 순 없어요.
로물루스: 모른 척 해야 하느니라.
레아: 조국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로물루스: 사랑하는 사람 없이는 살 수가 있느냐? 한 인간에게 충실한 것이 한 국가에 충성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니라. (...) 한 국가가 전쟁과 정복을 하면서 살인을 일삼기 시작할 때, 비로소 조국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레아: 우리의 무조건적인 애국심이 로마를 위대하게 만들었잖아요.
로물루스: 그런 애국심이 로마를 선하고 좋은 국가로 만들지는 못했다. 나는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국가에게 제발 맛있게 잡수쇼 하고 떠벌리는 저 비극의 주인공들과는 다른 사람이다. (...) 로마는 망할 것이다.
레아: 무서워요.
로물루스: 무서움을 이기는 방법을 배우도록 해라. 그게 오늘 날 우리가 배워야 할 유일한 기술이다. 두려워하지 않고 관찰하면서, 옳은 일을 하는 기술 말이다.
 
그는 닭들에게 모이를 주는 일(얼마나 생산적인가!)이나 하면서 망해가는 로마를 방치한다. 결국 게르만족들이 로마를 멸망시키러 온다. 오도아케르란 게르만 왕과 로물루스와의 대화를 보자.
 
오도아케르: 나는 평생을 위대한 인간을 찾아 헤맸습니다. 사실 난 농사를 좋아하고 전쟁을 싫어합니다. 또 게르만의 원시림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인간성을 찾고 있었습니다. (...) 스파이였던 그가 나에게 보고한 게 있지요. 한 인간에 관해서, 올바른 인간에 관해서, 바로 당신 로물루스에 관해서 말입니다.
로물루스 : 한 바보에 관한 보고이겠지요. 나는 온 생애를 로마 제국의 붕괴에 바쳐왔습니다. 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나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에, 모든 로마 제국 사람들에게도 크나큰 희생을 요구해 왔던 겁니다.
 
과학 기술을 통해서 이토록 거창한 문명을 만들었을지라도, 한 개인의 선택, 내적으로 용감한 개인의 지극히 자유로운 행동만이 이 세상에 실낱같은 희망이란 뜻인가?
 
‘국가에 저항하라’ 외친 톨스토이 

▲ <국가는 폭력이다>에는 만년의 톨스토이가 국가권력의 폭력성을 고발하며 쓴 에세이 8편이 실려있다.    
 
많은 사상가들이 보기에 사회에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소수에게만 권력이 집중되는 국가란 제도 때문이다. 그들은 왜 국가의 폭력에 사람들이 순응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해 왔다. 아나키스트들이 그러했고,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칭하지 않은 유명인들도 그러했다. 그 중에 레프 톨스토이가 있다.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처럼 고전이 된 소설들 말고도 그는 국가를 반대하고 철저한 비폭력 평화주의를 옹호하는 에세이도 많이 썼다.
 
<국가는 폭력이다>(레프 톨스토이, 달팽이, 2008)에는 만년의 톨스토이가 국가 권력의 폭력성을 고발하며 쓴 에세이 여덟 편이 실려 있다. 쉬운 문체로 누구나 알기 쉽게 쓴 글들이다. 그가 보기에 사람들의 일그러진 욕망을 부추기고 세계를 파멸로 몰고 가는 악마는 ‘국가’이다. 국가는 항상 폭력(전쟁, 군대, 공권력)을 통해서 탐욕스런 강자가 행하는 부당한 착취를 편든다.

또 자기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서 언제든지 ‘외부의 적’ 운운하며 애국심을 만들어내고 퍼트린다. (9.11 이후 미국이 ‘우리의 적인 이슬람 테러리스트 세력들’을 소탕하자면서 미국 국민들의 애국심을 한껏 고취시킨 뒤, 중동에서 보복 전쟁을 벌인 것을 기억해보라. 실제로 이것은 석유 쟁탈 전쟁이었다.)
 
그의 소설만 읽은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톨스토이가 대단히 과격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놀랄지도 모르겠다. 국가에 소속되지 않고, 국적 없이 사는 삶을 강력하게 옹호하고 있으니까. 그는 평생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고민했는데, 국가에 속해있는 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보았다. 인생 후반부에 가서는 농노들을 거느린 지주생활을 버리고 스스로 노동하며 살고 싶어 했다(이게 성공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또 채식, 금주 같은 금욕적인 삶을 행하며 구도자적인 삶을 살려고 애썼다. 대단히 종교적인 사람이었던 듯하다. 이 책에도 세속적인 기독교와 권력을 쥔 종교인들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진정한 믿음과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는 문장들이 꽤 나온다. 100여년도 더 전에 쓰인 글이지만 나한테 인상 깊게 다가왔던 몇 가지 구절들을 인용해보자.
 
“공장 일은 언제나 유해하고 단조로운 반면, 농업은 건강하고 다양성을 제공한다. 농업은 자유롭고 농민들은 자기 마음대로 일하거나 쉴 수 있는 반면, 공장일은 공장이 노동자들의 소유라고 해도 언제나 기계 작동에 따라 일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공장 일은 부차적인 반면 농사일은 일차적이다. 농업이 없으면, 공장이 존재할 수 없다.”
 
그는 산업 사회가 막 도래한 시대를 살았는데도, 당시의 지식인들처럼 산업적인 생산의 증가가 역사와 사회 발전을 위해 중요하고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 세기가 지나 산업문명으로 황폐해진 땅과 자연 앞에서 우리가 지금 깨닫고 있는 가치를 그는 당시에 열렬히 옹호한 것이다. 즉, 농민과 그 농민이 직접 소유하고 일굴 땅과 소규모 농업이 산업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 그는 땅에서 자기 먹을 것을 스스로 마련하는 정직한 사람들이 건강하고 자유롭게 사는 사회를 꿈꾸었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가 꿈꾸는 대로 가지 않았다.
 
“거대 국가의 억압적인 통치에 참여하는 일은 노예 상태를 계속 심화시키며 불행을 더 크게 만들 뿐이다. 위대한 혁명을 일으키려면 국가에 대한 복종을 그만 두어야 한다. 국가, 조국이 하나의 허구이고 삶과 진정한 자유야말로 실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국가와 권력 기관에 복종하는 태도가 끝나면, 한 세상이 끝나고 다른 세상이 시작될 것이다.”
 
“국가의 조치와 행위들은 사실 정당의 복잡한 싸움과 밀통을 통해서, 야망과 탐욕의 투쟁을 통해 결정되며, 국민 전체의 뜻이나 바람은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다.”
 
“지배 계층, 통치자나 관료뿐만 아니라 자본가, 기자, 대부분의 예술가, 과학자들처럼 특별히 유리한 지위를 향유하고 있는 이들이, 농민이나 노동자들보다 놀랄 만큼 유리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애국심에 의존하는 정부 조직 덕분이다. 그들은 국민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강력한 수단을 쥐고 있으며, 자신이나 타인에게 언제나 애국심을 고취한다.”
 
애국심에 호소해서 이익을 보는 자들이 있다는 것,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주리란 기대를 버려야 한다는 것. 국가에 대한 순진한 환상을 버리자는 주장에 나도 동의한다.
 
도시 안에서 빈털터리로 잘 살아가는 법 

▲ <도시형 수렵채집생활>(사카구치 교헤)은 도시에서 “빈털터리로 잘 살아가는 방법들”을 유쾌하고 재미나게 알려준다.
 
간단히 소개할 마지막 책도 흥미롭게 술술 읽을 수 있다. 일본에서 나온 <도시형 수렵채집생활>(사카구치 교헤, 쿠폰북, 2011). 집도, 직장도, 돈도 한 푼 없는 당신이 어떻게든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책은 도시에서 “빈털터리로 잘 살아가는 방법들”을 유쾌하고 재미나게 알려주고 있는 실용 핸드북이다. 도시에는 ‘도시의 양식’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니 자본과 권력에 노예처럼 굴복해서 살 필요가 없다. 생각지도 못한 자유를 누리면서 수렵채집인으로 잘 살 수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건축을 전공했던 저자의 이 전복적이고 기발한 발상이 나한테는 기특하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도시가 뱉어내는 ‘쓰레기들’을 자원으로 이용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주로 노숙인과 부랑인들인데, 이들 중에서도 보다 창조적인 사람들)을 원초적 생명력을 잃지 않은 사람들로 보고 있다. 저자의 생각이 국가나 도시의 폭력에까지 미치고 있지는 않지만, 현대 도시(일본 대도시)의 꽉 짜인 시스템에 대한 은근한 비웃음과 작은 틈새 저항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소유에 대한 생각의 변화가 흥미롭다. 왜 언제부터 이 땅들을 누군가가 전부 소유하고 있는 거지? 누가 그런 일을 허락했지? 국가? 국가가 만든 법?
 
나는 물질적 소유를 빼고 나면 인간의 생애는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누구나 인생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나이를 먹어간다. 그러면서 숨겨져 있어서 미처 못 보았던 것들을 보게 된다. 의식이 깨어나는 것이다. 이 깨어난 의식으로 젊든 나이가 들었든 간에 사람은 누구나 보다 자유로운 자기 삶의 기초들을 세워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유롭고, 여유롭고, 다채롭고 싶은 내 삶의 기초를 세울 때, 국가에 의존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나도 아나키스트? 맞다. 자칭 ‘에코 아나키스트!’) _도은

<남쪽으로 튀어!> 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로물루스 대제”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서문당에서 나온 <미시시피씨의 결혼>에 수록)
<국가는 폭력이다> 레프 톨스토이, 달팽이
<도시형 수렵채집생활> 사카구치 교헤, 쿠폰북
 
       여성주의 저널 <일다> Feminist Journal Ilda 바로가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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