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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슬럼, 지구를 뒤덮다 外 
 
현대문명과 거리를 둔 채, 산골에서 자급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도은님이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연재를 시작합니다. 도은님은 두 딸과 함께 쓴 “세 모녀 에코페미니스트의 좌충우돌 성장기” <없는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의 저자입니다. www.ildaro.com 
 
현대를 사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공간적, 심리적, 문화적으로 ‘도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서 살고 있고, 한국의 도시화 비율도 80%를 훨씬 넘어섰다. 살고 있는 곳이 비록 도시가 아니더라도 심리적으로는 도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도 많다. 소비 패턴, 유행하는 대중문화 애호, 구별 짓기와 차별화(‘저런 촌스런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니까요’) 등을 통해서.
 
나도 대학입학을 핑계 삼아 농촌에서 대도시로 옮겨갔던 사람이었다. 당시는 농촌 사람들이 한국 근대화와 개발 바람을 타고서 일거리나 교육의 기회를 찾아 한창 도시로 몰려갈 때였다. 그리하여 20대 청년 시절 대부분을 서울에서 분주하게 살았다. 학업, 일, 활동, 연애, 결혼이 모두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그 뒤 어떤 상황과 의지가 맞물려서 서울을 떠난 지 이제 20여년이 되어간다. 그때의 삶을 그리워한 적은 거의 없다. 도리어 내 몸과 마음은 도시적인 것과는 한참 멀어져서 누가 거금을 준다 해도(그럴 일이야 물론 없겠지만) 대도시에서는 살수 없을 것 같다.

도시의 삶의 양식과 풍경을 들여다보면…

인류 역사에서 도시(폴리스 국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알아갈수록 내가 더 이상 도시민이 아니라는 사실도 썩 괜찮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과거 역사에 등장했던 모든 도시 국가는 필연적으로 전쟁과 정복과 약탈, 노예제와 여성억압을 바탕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아테네에서 그토록 고상한 철학들을 하염없이 논하던 그리스와 로마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란 것도 결국 ‘남의 것 빼앗기’ 속에서 꽃핀 것 아닌가? 그들은 노예들과 여자들을 인간 취급도 안했다. 이런 정복과 차별의 역사가 근대 국가들(스페인을 위시한 서구 유럽과 영국)과 현대식 제국주의 모델인 미국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나?
 
그런데 외국인들이 보기에 남한은 현대사에서 굉장한 성공담을 거둔 나라로 비치는 모양이다. ‘일본 식민지였던 상처와 내전의 폐허를 딛고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 되었더라.’ 이 성공담의 주역은 당연히 서울이란 거대도시다. 천연자원의 빈약함을 도시에 몰려든 인적 자본들(!)이 대체했으니까. 한마디로 인간 자원들이 미친 듯이 일했고, 수출했고, 불도저로 모든 곳을 파헤쳤고, 부동산 투기했고, 자식들 과외 시켜서 유학 보냈다는 뜻이다. 이렇게 초고속 도시화 질주 끝에 이루어낸 도시 삶의 양식과 풍경은 어떠한가.
 
살풍경한 천편일률적 거리, 도시인들의 만성 피로, 빠르게 분열 증식하는 소비구조들, 혼성 모방으로 창조되는 욕구들, 기를 써도 왠지 만족의 끝에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탐욕의 용광로가 읽혀진다. 또 한국 마피아인 개발업자들과 부자들을 위해 국가권력이 개입하는 재개발 사업, 도시빈민 거주문제, 경제적 차별과 배제, 심각한 불평등 문제가 그 안에 있다.
 
우리는 왜 도시에서 살아야 하는가? 도시 예찬론자들이 말했듯 도시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인가? 아니다, 도시는 결국 시골과 제 3세계를 식민지화해야만 존속하는 것 아닌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던 차에 <슬럼, 지구를 뒤덮다>(마이크 데이비스, 돌베개, 2007)를 읽게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엉망진창 세계와 신자유주의 이후의 도시 문제를 아주 잘 보여주는 ‘문제작’이다.
 
세계의 도시들은 어떻게 슬럼화 되고 있는가

▲ 신자유주의 이후의 도시 문제를 잘 보여주는 <슬럼, 지구를 뒤덮다> 
 
“어떤 사람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은 그가 사는 집의 위상에 따라 결정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저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스스로를 ‘국제 사회주의자’이고 ‘마르크스주의 환경주의자’라고 밝힌 저널리스트 연구자이다.
 
내 입장도 비슷하다. 관심을 기울일만한 책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서 해독법이 달라진다고 본다. 가령, 호화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슬럼 문제를 파헤치는 이런 책을 진지하게 읽을까 싶다. 전공 연구나 리포트를 내야할 의무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들은 파리나 뉴욕이나 로마처럼 겉보기에 세련되고 찬란한 이미지를 가진 도시 이야기를 선호한다. 그런 도시들을 찬미하는 문화서적이나 여행서적을 읽으면서, 서울이나 부산이 그런 세련미와 수준이 한참 떨어진다면서 속으로 경멸할 것이다.
 
‘도시’하면 어떤 것들이 떠오르는가? 교육, 기술, 아이디어, 인재들이 모여드는 활기차고, 기회가 충만하고, 편리하고,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곳? 아니면 교통지옥, 물가 비싸고, 더럽고, 가난하고, 범죄 소굴인데다 반환경적인 곳? 어떤 집에서 사는가에 따라 입장이 달라질 것 같다.
 
물론 도시는 놀라운 곳이다. 인접성과 인구밀집을 바탕으로 한 혁신적 발명과 소비의 중심지이자 최첨단 아이디어의 관문이라는 데 동의한다. 서울과 경기도에서 보듯이 엄청난 인구를 빨아들이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도시를 인류 발전의 엔진이라고 보면서 도시의 승리와 황금시대를 예찬하는 책이 지금도 쏟아져 나오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어느 미국 도시경제학자가 서울 발전을 찬양하면서 “상경한 근로자들이 농촌 공동체에서의 고립된 생활을 접고 세계 경제의 일부가 된 것이 서울을 위대한 도시로 성장시킨 토대” 운운하는 글을 읽었을 때는 냉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래? 너희들의 세계화 시장의 먹잇감으로서 인구가 밀집한 서울은 꽤 쓸 만하겠지?’
 
<슬럼, 지구를 뒤덮다>는 다른 시각으로 ‘세계 도시의 슬럼화’를 바라본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 세계 도시, 특히 제 3세계 대도시들이 어떻게 빈곤화와 슬럼화로 떨어지고 있는 지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책 뒤에 해설을 쓴 한국 경제학자 우석훈도 말하듯이 이게 결코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니다. 한국 역시 정부 통계에조차 잡히지 않는 비공식 경제로 내몰린 사람들이 나날이 늘고 있고, 도시화의 추동력은 더 이상 산업발전으로 인한 고용 증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데이비스가 보여주는 21세기 도시는 암담하다. 도시 경제는 퇴보하고 있는데 인구는 급증하는 이 기이한 상황은 무엇 때문인가? 원인은 농촌의 몰락이다. 농촌이 몰락한 원인은 한국은 박정희 정부의 반강제적 이농정책이었고, 남미나 아프리카 같은 제 3세계는 가중된 외채부담, 채무위기, IMF 같은 구조조정이 주역이다. 이제 사회적 안전망이 상실된 농민들은 대다수가 도시로 가는 것 말고는 별 대안이 없다. 인도와 브라질과 중국 농민들의 도시 이주 현상을 보자. 이들에게는 슬럼가의 무허가 판자촌 말고는 살 곳이 없다.
 
제국주의 시대의 인종차별적인 정책들이 점점 빈민차별적인 도시 슬럼정책으로 이어진다. 이제 슬럼가조차 부자들의 투자 대상이 되고 착취할 부동산이 된다. 이렇듯 도시 개발의 역사는 국가가 가난한 이들을 배제하고 통제해온 역사이다. 우리도 용산에서 보았듯이 도시 빈민가는 공권력이 편들어주는 재산권과 생존권이 충돌하는 곳이다.
 
“필리핀 지주들은 ‘뜨거운 철거’를 선호해서 들쥐나 고양이를 석유에 적신 다음 불을 붙여서 골치 아픈 슬럼가에 풀어놓는다.”
 
마천루, 초호화 아파트 단지, 강변 산책로, 관광객 편의 시설을 건설하기 위해서 한국도 가난한 이들의 주거지를 불도저로 밀어대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나라이다. 이제 세계화의  파도 속에 휩쓸리기까지 한 도시는 최악의 불황과 불평등과 혼란이 지배하는 곳이 되어가는 것일까?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슬럼가를 거느린 도시는 어떤 파국을 맞게 될까? 뭔가 벗어날 방법이 있기나 한 걸까?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슬럼 주민이 구조적 방치 및 박탈에 반응하는 방식은 한 도시 안에서도 엄청나게 다양하다. 시혜를 베푸는 교회와 예언적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도 있고, 소수민족 의용군, 거리의 갱단, 신자유주의 NGO, 혁명적 사회운동에 가담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 세계 슬럼에는 획일적이거나 일방적인 경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각양각색의 무수한 저항운동이 존재한다. 실재로 인류 연대의 미래는 새로운 도시 빈민이 전 지구적 자본주의 속 최악의 밑바닥 위치를 전투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1% 부자들을 위한 ‘그들만의 지상낙원’ 

▲ 불평등과 구별짓기, 배제를 통해 만들어진 세계 1% 부자들의 '낙원'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는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      
 
이 도시 슬럼가에 대한 공포를 바탕으로 요새화된 고급 주택지들이 전 세계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마이크 데이비스 엮음, 아카이브, 2011)란 책을 읽으면, “신자유주의 꿈의 세계”에서 불평등과 구별 짓기, 배제의 지리학으로 특징지어지는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를 구경할 수 있다. 1% 부자들을 위해 건설된 “지상의 낙원”이자 놀랍도록 화려하고 요염한 “악의 꽃들.”
 
이 책에는 언론인, 도시학자, 역사학자, 지리학자, 시민운동가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진 이들이 쓴 열아홉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어떤 글은 여행기처럼 읽히는 흥미진진한 보고서 형식이고, 무슨 미래 소설처럼 읽히는 글도 있다. 또 아리송한 문화 문석과 최신 담론을 적용한 글도 있다. 두툼한 책이지만 글들이 다양해서 흥미롭게 읽었다.
 
유럽과 미국 중심으로 사고하는 내 편협한 시야를 많이 열어준 책이다. 비싼 돈 들여서 해외여행을 가지 않아도 석유 중독자들인 아랍세계 부자들이 구축한 중동의 인공낙원들을 엿볼 수 있었다. 지금은 파산했다는 두바이, 이란의 인스턴트 성채 아르그에자디드, 군벌과 이교도들의 도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등의 실상이 꽤 자세히 나와 있다. 내 눈에는 이곳들이 사막에 피어난 악의 꽃들처럼 보인다. 제 3세계 이주민들의 노예노동과 석유, 마약, 카지노 금융으로 지탱되는 곳들이기 때문이다.
 
거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세계화의 하인들, 즉 건설 노동자, 경비 노동자, 가사 노동자들은 극소수 부자들만의 파라다이스에서는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 취급된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생존을 위한 사투는 전혀 역동적이지 않고 정적인 것일까? 저항 없이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들이다. 생존자체가 아슬아슬한 사람들한테 ‘인생에 의미와 존엄성을 부여하며 삶의 용기를 줄 목표’ 따위는 사치일까?
 
뒤늦게 산업혁명을 하느라 도취한 중국 베이징의 실상, 황금과 폭력배들의 도시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공산권 몰락 후 부르주아 되기 광란에 휩싸인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관한 글들은 어떤 풍속 여행기보다 흥미롭게 읽힌다. 또 제주도 네 개를 합친 땅을 혼자 소유한 언론 재벌 테드 터너의 ‘인간 없는 유토피아’ 이야기도 나온다. 그는 생태적 독선과 이윤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빈틈없는 능력을 과시한다. 책을 읽다보면 호기심, 경악, 흥분, 놀라움 등에서 비롯된 아드레날린이 솔솔 나오는 것 같다.
 
또 자기 우상화의 공간인 개인미술관 이야기나. 아메리칸 스타일로 영성을 쇼핑하는 곳인 고급 수도원 피정 프로그램을 읽을 때는, ‘그렇지, 뭐’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영성 프로그램들도 ‘사회 정의 없는 영성 팔기’ 경향을 보이고 있으니까.
 
“수도원 피정은 신자유주의 영적 논리의 기본적인 표현이며, 그 핵심가치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유와 탈규제, 안락과 고립, 개인주의와 공동체의 결여, 단기적인 헌신 등의 가치 말이다. (...) 피정 참가자들은 자신이 현재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부정하거나 개조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수도원이라는 환경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함으로써 그것을 신성화한다. 거의 텔레비전 시청과 별다를 게 없다.”
 
“지금 세대의 천국 관념은 미학적으로 만족스럽고, 역사를 오도하며,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윤리적으로는 요구하는 바가 많지 않은 라이프스타일이다. (...) 선택의 자유, 과시를 통한 덕행, 사회 정의 없는 영성 같은 21세기적인 가치들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인간’의 지독하게 배타적이고, 지독하게 비열한, 인종적 계급적 불안감을 엿볼 수 있었다. 인간이 자신의 어마어마한 생산력에 압도당하면 이렇게 미치고 마는 걸까? 이 낙원 도시는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은 환각의 도시 아닌가? 석유가 끝나면 금방 무너질 수밖에 없는 곳들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헤게모니는 자기조절적인 시장이나 수요와 공급, 심지어 하나의 자율적인 범주인 ‘경제’와도 별 관계가 있다. (...) 역동적으로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적 불평등은 현대 경제가 무심코 야기한 결과가 아니라 경제의 동력 그 자체이다. (...) 좋건 싫건 다국적 기업가 부자들이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 게다가 전 세계적인 저임금 노동자 집단들이 계속 공급되고 있기 때문에, 임금은 결코 안 오르고 부자들만 점점 더 부자가 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런 지속적인 공격에 대한 대가는 거의 일방적으로 도시 빈민에게 전가된다. (...) 이 메트로폴리스들은 이주노동자들의 피땀으로 일군 것이다. 그들은 냄새나는 막사나 황폐한 천막촌에서 살고 있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유토피아적 사치와 ‘극상의 라이프스타일’로 빛나는 섬들은 ‘슬럼들로 이루어진 행성에 붙어사는 기생충’에 불과하다.”
 
요즘 유행하는 ‘흡혈귀’ 이미지도 떠오른다. 겉보기에 우아해 보이고, 생태적이고 친환경적인 성채에서 사는 이 흡혈귀 신귀족들은, 전 세계의 시장을 컴퓨터로 원격 조정하면서 빈민들의 피를 빨아먹는 ‘무한 폭식증’ 환자들을 빗댄 듯하다.
 
‘강남’에서 한국사회를 읽다 

▲ 한국인의 적나라한 욕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 '강남'을 통해 한국사회를 들여다본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다음 책은 한국 상황이다.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이란 책을 보자. 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강남은 한국인의 적나라한 욕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이다. 저널리즘 사회비평가인 강준만이 쓴 글들은 늘 명쾌하고 잘 읽힌다.
 
“강남은 아파트 문화의 선구자이고 욕망의 용광로이자 구별 짓기의 아성이다. 한국의 초고속 성장을 온몸으로 드라마틱하게 웅변하는 지역이다. 강남이 가장 한국적이다. 아니, 강남이 한국이다.”
 
“한국형 자본주의 욕망의 위계질서에 있어서 강남은 상층부를 점하고 있다. 이 자본주의는 강력한 서열과 강한 경쟁심과 모방심리에 의해 움직인다. 이게 바로 ‘강남 정신’이다.”
 
“더 나은 칸막이(아파트) 속으로 들어가려는 몸부림은 한국 현대사가 요구해온 철칙이었다. (...) 더 좋은 교육환경? 아니다, 그게 아니다. 구별 짓기일 뿐이다. 해외유학이나 어학연수 모두 내수용이다. 한국 내에서의 경쟁을 위해 구별 짓기를 하고 싶은 게 더 큰 이유이다.”
 
시골 사람이 서울로, 강북 사람이 강남으로, 강남 사람은 해외로 ‘더 좋은 교육 환경’을 따라 이동한다고 말들을 하지만, 강준만은 솔직하게 말한다. 그건 ‘구별 짓기’의 욕망이고, 이 속엔 한국 특유의 ‘인맥 만들기’가 있다고.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의 핵심은 ‘인맥 만들기’이다. 한국의 그 살인적인 대학입시 전쟁도 그 본질은 ‘인맥 만들기 전쟁’이다. 서울대의 위대성도 타 대학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 인맥에 있다.”
 
그렇다. (불쾌하지만) 한국 사회에선 인맥이 곧 능력이 될 때가 많다. ‘보이지 않는 카스트 제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실제로 서울대 출신들이 그런 말을 한다. (비판적 관점에서 말하는 이도 있지만 만족해하며 말하는 작자들도 있다) 강준만은 솔직해지자고 한다. 한국인 대다수가 강남이 주는 사회적 상승 기회와 교육 환경을 꿈꾸지 않느냐고.
 
내 생각에도 강남은 소비문화의 선두 주자로 한국 사회에서 강력한 문화 권력과 상징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인들이 워낙 “물 좋은데”와 “기 살리는 곳”에 민감한지라 강준만은 “한국 자본주의의 진로를 수정하는 것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 사회의 진로를 수정하는 거야 어렵다 해도, 개인의 진로를 수정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당신들이 강남의 타워팰리스에서 호화롭게 사는 건 좋다. 나는 당신들의 삶에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다. 근데 열리지 않는 전망 창으로 저 멀리 보이는 개포동의 판자촌까지 집어삼키려고 군침 흘리지는 마라. 궁전 안에서 당신들끼리 서로 차별하고 배제하는 놀이를 하는 거야 누가 말리랴. 하지만 가난한 자들의 몫까지 빼앗으려고 기웃거리지는 마라. 이미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빼앗았지 않았나.’
 
‘강남 스타일’의 삶에 별 관심이 없는 이들은(의외로 꽤 있다고 본다) 조금 다르지만, 더욱 열려 있으며, 지속할 수 있는 건전한 삶의 양식에 눈을 돌릴 것이다. 자기들끼리 팰리스에 높은 담을 두르고 빈틈없이 CCTV로 감시하며 산다한들, 그 삶은 절대로 지속가능하지 않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상상 하나: 60층짜리 초호화 주상복합 건물에 전기와 수돗물이 끊긴다면?)  _ 도은

   <슬럼, 지구를 뒤덮다> 마이크 데이비스, 돌베개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 마이크 데이비스 엮음, 아카이브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 여성주의 저널 <일다> Feminist Journal Ilda 즐겨찾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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