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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소녀들, 그리고 이상한 동네언니

<노년여성의 경험을 잇다>1. 시간을 잡는 소녀들


※ 노년여성들이 살아온 생의 이야기와 다양한 경험이 역사 속에 그냥 묻히지 않고 사회와 소통하며 다음 세대와 교류할 수 있도록, 노년여성을 만나 인터뷰 작업을 해 온 여성들의 기록을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시간을 잡는 소녀’들과 할머니

 

할머니가 좋다. 호미 하나로 세상을 호령할 것 같은 들판의 할머니도 좋고, 미용실에서 꼬불꼬불 파마하는 할머니도 좋고, 툇마루에 앉아 마당을 한참 바라보는 할머니도 좋다. 물론 나만 보면 ‘시집가라, 애는 언제 낳냐.’ 끊임없는 잔소리가 언제든 흘러나오지만. 할머니에게서는 잔소리 말고도 당당하게 살아낸 그들의 멋진 인생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그 귀한 이야기들이 소멸되어가는 것이 늘 안타까웠다. 고등학생 소녀들이 <시간을 잡는 소녀>(약칭 시잡소)라는 잡지를 만들게 된 배경은 바로 이 지점이다.


▶ 윤옥례 할머니 집에 모인 소녀들. (할머니 옆 자리가 필자)  ⓒ 시잡소

 

소녀와 할머니. 이 얼마나 안 어울리는 조합인가.

 

예전에야 마을 안에 다양한 연령층이 함께 부대끼며 살았다지만 요즘의 마을 모습은 많이 다르다. 어딘가에 어르신들이 많이 모여 있다면 어린 사람들은 슬슬 피해가기 나름이다. 어린 사람들은 ‘꼰대’라고 피할 것이고, 어르신들은 ‘요즘 것들, 쯧쯧…’ 잔소리할 준비를 하실 게 분명하다. 이 둘을 만나게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지역의 비빌 언덕이 반백수를 먹여 살리다

 

시간을 잡는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나라는 사람이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에 깃들어 지내게 된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전주에서 서른이 지나도록 살았고 그 어디에도 떠나 산 적이 없다. 이십대 후반까지 몸 바쳐 마음 바쳐 뜨겁게 다니던 직장도 때려치우고 프리랜서로 살아 온 지가 이제 6년 째.

 

대학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해서 영화도 몇 편 찍고 상도 받으니 의기양양해져서 전주의 로컬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지만, 빚이 생기더란 말이다. 생계와 꿈의 간극은 이리도 먼 것인가. 영화강사 일과 인맥을 총 동원해 비영리단체들의 행사 기록 영상이나 홍보 영상을 제작하며 살아가고 있던 찰나, 뜬금없이 사람에 대한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입학했다. 누군가의 생애사를 기록하는 것에 필이 꽂힌 것. 하지만 의자와 엉덩이의 간극은 또 이리도 먼 것인가. 일주일에 서너 권의 책을 읽고 레포트를 쓰고 토론하는 일에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다.

 

▶ 지역 행사장 촬영중인 필자.    ⓒ장미경

 

그래서 도망치듯 떠난 곳이 완주군 고산면이다. 팽팽하던 끈을 일단 놓고, 내 삶을 다시 정비하고 하고 싶어 2012년 퍼머컬쳐대학에 입학했다.

 

※ 퍼머컬쳐란? 영속적이라는 뜻의 ‘permanent’와 농업을 뜻하는 ‘agriculture’의 합성어로 식량, 토양, 수자원, 에너지, 주거지 등 인간에게 필요한 자원을 공급하기 위한 시스템을 자연생태계와 조화롭게 만드는 방법을 말한다. 다시 말해 환경, 생태, 농업을 하나로 통합하여 지속 가능한 인간의 삶을 지탱해주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출처: 임경수 <농, 살림을 디자인하다>

 

전주시와 완주군를 오가며 놀고먹고 공부를 했다. 생계를 위한 일들과 퍼머컬쳐 공부와 실습을 병행하며 1년이 지났다. 또 떠나야 하나 고민했지만 다행히 지역에 비빌 언덕이 많았다. 마을 소식지를 만드는 ‘미디어협동조합 완두콩’에서 지면 2장을 내어주며 글을 써보라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어르신들의 인생 이야기와 오래된 가게, 평생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하고 글을 쓰는 일이었다. 물론 글 값도 주셨다. 중고자동차도 한 대 장만해서 완주 곳곳을 쏘다니며 여러 사람을 만났다.

 

‘널리널리 홍홍’에 모인 소녀들

 

전주에서의 내 생활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만나던 사람들만 만나고 다니 던 곳만 갔다. 완주에서의 생활은 정반대였다. 무한한 변주가 있고 계획하지 않은 일들이 발생한다. 완주에서 지내면서 나에게 생긴 여러 가지 호칭이 이를 증명한다.

 

‘미경쌤, 기자양반, 노처녀, 이모, 언니, 장양, 장 감독… 그리고 장 사장!’

 

고산면의 시장 한 귀퉁이에 지역의 공동체들이 만든 물건을 모아 판매하는 가게의 사장이 된 것이다.

 

가게 이름은 ‘널리널리 홍홍’. 공간이 생기니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 듯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동네 꼬마들부터 동네 청년들, 아이엄마, 어르신들. 심지어 고양이까지. 물건을 파는 가게인데 사람들이 와서 몇 시간이고 놀다 간다. 근데 이게 싫지만은 않더란 말이다.


▶ 전북 완주군 고산면 시장 한 귀퉁이 가게 <널리널리 홍홍> 앞에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장미경

 

자. 이제 시간을 잡는 소녀들이 등장한다. 소녀들이 중학교 2학년이던 때에 처음 만났다. 지역의 다양한 일꾼들을 소녀들이 만나 인터뷰해서 다큐로 제작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난 진행 강사였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 바로 우리 가게 ‘널리널리 홍홍’이 생겨났고, 자연스럽게 이곳은 소녀들의 아지트가 됐다. 권오영, 문은혜, 임예빈, 심소희. 소녀들이 이제 18세 고등학생이 되었다.

 

함께 컵라면 끓여 먹고 노래 듣고 게임하고 만화책 읽고 멍 때리던 3년의 세월이 없었더라면 잡지 만드는 일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놀다가 지친 우리들은 이제 슬슬 뭐라도 해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행히 지역의 여러 단체들이 지원을 해줬다.

 

그래서 우리는 잡지 만들기에 도전했다.

 

서로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잡지를 만들다

 

소녀들은 자신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완주군에는 청소년들보다 어르신들이 더 많다. 소녀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어르신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읽어줄까.

 

고민하던 소녀들은 ‘청소년들과 어른들의 언어체계가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요즘 아이들은 게임언어나 그것에서 생겨난 줄임말들을 사용한다. 그러니 어르신들은 요즘 아이들 말을 도통 알아들을 수 없다. 역시 어르신들은 사투리를 많이 사용하신다. 그래서 소녀들 또한 어르신들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어르신들과 청소년 모두가 함께 읽을 수 있는 잡지를 기획하고, 소녀들은 동네 할머니들이 쓰는 언어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 시간을 잡는 소녀들!   ⓒ장미경

 

<시간을 잡는 소녀> 잡지에 실린 ‘요즘 것들의 말’과 어르신들이 사용하시는 ‘구수한 말’의 일부분을 소개하겠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보면 거의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했다. 그것이 우리가 쓰는 말에도 영향을 미쳐 기성세대와 청소년들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사용하는 언어는 같지만 은어라는 벽이 소통을 막고 있다. 우리는 그 벽을 허물기 위해 청소년의 은어와 어르신들의 은어를 풀어 서로 엮는 시도를 하려 한다.

 

<요즘 것들의 말>

◆ 노답: 답이 없다 라는 뜻이다.

◆ 열폭: 열등감 폭발의 줄임말이다.

◆ ~각: ~할 것 같다 라는 뜻이다.

◆ 개샹마이웨이: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는 뜻이다.

◆ 셀기꾼: 셀카 사기꾼의 줄임말로 실물과 다르게 사진을 찍는 사람을 말한다.

◆ 개이득: 아주 크게 이득을 보았다 라는 뜻이다.

 

<구수한 말: 일명 전라도 어르신 언어>

◆ 성: 할머니들 사이에서 언니라는 뜻이다. 

   추측하자면 형이라는 말을 사투리로 성이라고 부르지 않나 싶다.

   성, 어디 다녀와? = 언니, 지금 어디 다녀와?

◆ 싸게: 전라도 사투리로 빨리라는 뜻을 지녔다.

   싸게 싸게 오라니까! = 빨리 빨리 오라니까!

◆ 시방: 지금이라는 뜻이다. 

   시방 뭐하는 거야? = 지금 뭐하는 거야?

◆ 말짓: 잘 정돈 되어 있는 것을 어지럽혀 놓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누가 말짓 하라고 했어! = 누가 말썽 부리라고 했어!

◆ 개롭다: 가렵다. 라는 뜻의 말

   여기가 왜 이렇게 개로워? = 여기가 왜 이렇게 가려워?]

 

“17살 시집갈 때, 비녀를 처음 꽂았지”

 

시간을 잡으려는 아이들은 집 안 깊숙한 서랍 안에 숨어있던 어르신들의 오래된 사진들을 수집해 잡지에 싣기도 했다. 또한 동네 할아버지가 기증한 오래된 필름 카메라를 들고 고산면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필름 카메라의 ‘찰칵’ 셔터 맛을 제대로 맛 본 것이다.

 

나름대로 잡지 흉내를 낸다고 패션뷰티 코너도 기획했다. 소녀들은 비녀 꽂는 할머니를 찾아가 머리 손질 방법과 비녀 꽂는 방법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시잡소 멤버 중 임예빈의 외할머니기도 한 윤옥례 할머니 집으로 찾아간 소녀들은 할머니가 처음 비녀 꽂을 때 이야기를 인터뷰했다.

 

[소녀들: 언제 비녀를 꽂으셨어요?

 윤옥례 할머니: 17살 시집갈 때, 그때 처음 꽂았지.

 소녀들: 우리가 17살인데…

 윤옥례 할머니: 처음에는 해주는 사람이 있었지. 내가 어떻게 쪽질 줄을 알겠어? 시집올 때 어머니 떨어져서 아버지 떨어져서 동상(동생)들 떨어져서 슬프니께 울었지. 우리 동상들이 내 무릎 팍에서 언니언니 하면서 우는데 그것들 다 떼어놓고 오니께 슬프잖아. 많이 울었지. 가마타고 오면서도 많이 울었어.]

 

▶ 권오영의 머리에 비녀를 꽂아주는 윤옥례 할머니의 손.  ⓒ장미경

 

윤옥례 할머니는 굽은 손으로 자신이 시집올 때 나이랑 똑같은 17세 소녀를 앉혀 놓고 긴 머리를 꼬아서 비녀를 꽂아주시기도 했다. 지켜보던 나는 그 모습에 갑자기 눈물이 차올라서 참아내느라 혼이 났다. 그때 찍은 이 한 장의 사진이 우리가 만든 잡지의 모든 기획의도를 대신하는 것 같다.

 

소녀들과 할머니의 큰 간극 사이 살짝 껴있는 나

 

작년 가을에 만들기 시작한 잡지는 겨울방학 때까지 이어져 올해 1월 중순 경에 완성이 되었다. 완주 곳곳에 배포해서 2천 원씩 판매하기 시작했다. 우리 재밌자고 시작한 일인데 입소문이 난 모양이다. 모 신문기자가 서울에서 내려와 소녀들을 취재해 가기도 했다.

 

한바탕 소란스러움이 지나간 후 우리는 <시간을 잡는 소녀> 2호를 준비 중이다. 기획회의를 하면서 여전히 싸우기도 한다. 그 모습이 꽤 보기 좋다. 스마트폰 보면서 자기만의 세계로 빠지는 것보다 그 모습이 훨씬 뜨겁고 좋다.

 

올 여름엔 거제를 갈 수도 있겠다. 머나먼 거제의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우리의 잡지를 보고 신호를 보내왔다. 영상을 만들고 싶은 친구인데 ‘시잡소’ 소녀들을 만나고 싶다고. 그래서 우리도 응답해야 할지 열심히 고민 중이다.

 

▶ 잡지 <시간을 잡는 소녀> 창간호.  ⓒ장미경

 

여전히 나는 마을에서 약간은 이상한 여자이다. 나이는 들었는데 왜 결혼은 안 할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시장에서 장사를 한다고 하고, 어떤 날은 카메라를 들고 행사장에 나타나지를 않나, 어떤 날은 동네 아기를 데리고 다니지를 않나.

 

처음 몇 해는 나에 대해 설명하려 애썼지만, 나에게 생긴 여러 호칭처럼 그 모든 게 ‘나’이다.

 

그 중에 동네언니가 가장 마음에 든다. 나 어린 시절 살던 마을을 생각해보면 동네언니, 오빠들만큼 좋은 스승이 없었다. 물론 불장난이나 동네 물건 파손, 혹은 일찍 배우는 술 문화 등도 있지만. 학교에서는 지식을 배우고 동네에선 지혜를 배웠다. 소녀들과 할머니의 큰 간극 사이에 살짝 껴있는 나는, 이상한 동네언니다.  장미경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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