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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공동체를 실천하는 비혼 페미니스트에게 ‘공간’이란

<주거의 재구성> 공덕동하우스 이야기(2)



비혼지향 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는 현재 공덕동에 공간을 갖고 있지 않다. 엄밀히 말해 공덕동하우스가 사용하는 공간이 없고, 가장 최근의 총회는 대관한 공간에서 치렀다. 나와 몇몇이 서대문구 모처로 이사를 와서 생긴 변화다.


서대문구의 야심 찬 사업으로 여러 주체들을 ‘소셜믹스’한, 그러니까 거주자를 국가유공자, 신혼부부, 청년으로 각각 카테고리별 모집해 다른 동에 넣어 뒀는데 크게는 한 단지에 들어가게 해놓은 공동체주택에 들어와 있다.(살아 보니 엄밀히 말하면 다양한 사람이 함께 잘 살게 한 것도 아니고, 엉망인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 이사는 공동체에 대한 나의 경험의 결을 다시 한 번 바꾸어 놓았다.


이사 오자마자 현관문에 매단 친구의 여행 선물인 조개껍질 장식 ⓒ홍혜은


자연발생적 공동체와 공공임대 공동체 주택 


공덕동하우스는 결혼을 경유하지 않는 다른 관계를 중심으로 ‘생활공동체’를 지향했다. 혈연가족 이외 생활공동체라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나도 모르겠다. 누구도 완벽히 정의하지 못했다고 알고 있고, 한 가지 정의가 나오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도 여긴다. 다만 공덕동 공간은 거실 딸린 투룸이니 한 서너 명까지 사는 게 공간적 한계로 정해진 ‘정원’이었고, 그 건물이 마음에 들어서 같은 건물 4층에 친구가 이사 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나눴지만 단기 월세 계약, 이사를 결정하기 어려운 각자의 시기, 금전적 사정 등으로 논의는 거기까지였다. 공덕동 이상으로 공간이 확장되고 재구획되면 관계망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그때의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뭔가 ‘이상하다’는 감각은 있었다. 나는 혈연 가족과 살 때 열 평 아파트에 일곱 식구가 살기도 했다. 공덕동이 그것보다 넓었으니까 끼어서 살면 우리도 사람을 공간에 우겨 넣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렇게 해야만 생활공동체가 ‘주거공동체’로 인정받아 ‘대안가족’ 행렬의 맨 끄트머리에 줄을 설 수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나는 장녀로서 고3이 되자마자 혈연 가족의 비좁은 주거 공간에서 첫 번째로 분리되어 나왔다. (독서실 책상에서 먹고 자고 했는데, 이미 태어나서 한 번도 부모집이라고 상상되는 30평대 이상 넉넉한 아파트를 가진 적이 없으니 딱히 그렇다 할 ‘집’의 경험이 없이 자랐다고 할 수 있다.) 여튼 그 분리 생활이 15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데도, 재작년까지는 혈연 가족과 ‘한 가구’로 모든 복지 혜택에 묶여 있었다. 같이 사는 것과 가족으로 취급 받는 것은 서로 필요충분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같이 살지 않아도 소속감, 연결감을 갖고 가능한 대로 친밀을 나누고 돌봄을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생활공동체였다. 그래서 같이 사는 사람, 몇 달 같이 살다가 이사 간 사람, 같이 살지 않아도 일주일에 두 번은 오는 사람, 삼 개월에 한 번 정도 오는 사람까지 모두 공동체의 구성원이었다.


공덕동하우스에서 공유하는 서재 겸 작업 공간 ⓒ홍혜은


하지만 이번 이사에서 윗층, 아랫층 이웃으로 여러 명이 가까이 지내는 경험은 이전과는 또 다른 식의 관계 경험이다. 근거리에서 함께 지내는 사람이 있단 것의 의미를 점점 더 알아가고 있다. 쉬는 날 서로 잠 깨는 시간 봐서 근처 천변을 함께 달리고 들어온다든지, 어딘가 강연을 들으러 나갔다가도 함께 들어오는 길에 소감을 나눌 수 있다든지, 수박을 아무리 큰 걸 사 와도 아무 걱정 없다든지, 목적 없는 산책을 여러 번 같이 하다가 동네 고양이들 안면을 터서 고양이 성격, 생김새로도 한창 수다를 떨 수가 있다든지, 그런 게 좋다.


‘함께 살기’가 주거지에 있는 물건의 소유권을 다 섞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구 세대주인 동생과 현 세대주인 내 물건이 섞여 있는데, 그건 우리가 무소유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오랜 시간 저소득계층 집안에서 한 공간을 쓰는 자매로 살아 온 결과값이다), 또 감정적이고 물리적인 거리 조절에 실패해 사고가 나지 않는 방식으로도 가능하다는 게 이웃으로 살기의 큰 장점인 것 같다. 내 인식 세계에 괜찮은 관계 방식의 경험이 또 하나 늘어난 것 같아 기쁘다.


제도는 여전히 우리를 주거공동체로도, 생활공동체로도 인식하지 않는다. 다만 1인 가구들의 ‘모둠’일 뿐이다. 여기 입주하기까지도 많은 일이 있었다. 방이 세 개나 있지만 방마다 한 사람이 심사 받고 한 사람 명의로 계약해야 해서, 들어오고 싶은데도 주소지, 취업여부, 소득증명, 신용등급 등등 여러 복잡한 기준에 걸려 못 들어온 공동체원들이 있었다든지, 공공임대형 셰어하우스에 대한 주택 대출 기준이 부재한 채로 한 개 호실에 대해 여러 명이 버팀목 대출을 시도하느라 은행, sh공사, 국토교통부의 ‘몰라요’, ‘안돼요’, ‘저희 소관이 아니라서’, ‘그건 저쪽에 얘기하세요’를 돌림노래로 들으면서 마음 졸이며 여기저기서 박대 당했다든지. 대출 건은 결국 주변 주거권 활동가의 도움을 받아 민원을 조직하고 언론을 이용해 세칙을 개정하는 쾌거를 누린 듯 했지만, 정작 현장이 빠르게 따라와 주지 않아서 아무도 그 대출을 못 받기도 했다.


입주 후에는 방마다 벽걸이 에어컨을 설치할 것이냐, 거실에 스탠드 에어컨을 설치할 것이냐를 구성원들끼리 열심히 민주적으로 토의해 결정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호실엔 스탠드 에어컨을 설치할 공간 같은 게 애초에 없었다든지, 전화를 걸어 항의하니 “원래 그 집은 혼자 한 사람씩 들어와 살라는 거다”라고 설명을 듣는 등 소소하나 거대한 몰이해의 장벽이 있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고(사실이 아니다) 수입도 적은 주제에 결혼-출산, ‘애국’ 루트를 벗어났다고 여겨지는, 제도가 반기지 않는 삶을 살아서 이런 것일까? 이렇게 저렇게 추측해 볼 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다. 이 나라의 출산율은 2017년 1.05명, 2018년 0.98명, 2019년 0.92명, 차별 사회에서 앞으로도 더 신나게 떨어질 테니까.  (기사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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