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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밖 십대로서 마지막 해를 보내며
<선 밖으로 나가도 괜찮아> 여연의 산촌 홈스쿨링 이야기① 
 
[‘일다’는 사회가 강요하는 10대, 20대의 획일화된 인생의 궤도를 벗어나, 다른 방식의 삶을 개척해가는 청년들의 시간과 고민을 들어봅니다. 특별기획 “선 밖으로 나가도 괜찮아” 연재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교육제도 바깥에서 보낸 시간들

▲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학교를 벗어나 산촌 집에서 밭일과 집안일을 하며 십대를 보냈다.    © 여연 
 
학교 밖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지가 어느덧 7년 가까이 되어간다. 초등학교 5학년을 막 마치고 엄마의 강한 의지에 따라 학교를 그만 둔 직후에는 모든 게 어리둥절했다. 겨울방학이 끝났는데도 학교에 돌아갈 필요가 없다니 어린 마음에 흥분하기는 했지만, 교실에서 보내던 시간을 뭘 하면서 채워나갈지에 대한 생각 따위는 내 머릿속에 털끝만큼도 들어있지 않았다.
 
의무적인 밭일과 집안일을 끝내고 나면 그저 빈둥빈둥 시간 죽이기에 바빴고,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이 ‘공부’ 라는 말만 나오면 도망부터 쳤다. 소설책이야 주구장창 읽어댔지만 독서의 맥락은 전혀 없었다. 내가 만약 엄마로서 이런 딸을 키워야 했다면 꽤나 골치를 썩었을 것 같다.
 
확실히 엄마는 딸에게 뭔가를 가르치는 일을 부담스러워했다. 덕분에 나는 한동안 자유방목 상태로 원하는 만큼 나태해져 볼 수 있었다. 그나마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글쓰기 모임, 지역밴드활동, 과학사 책 낭독 등을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지만, 철딱서니 없던 나는 이 모든 일들에 거만하면서도 수동적인 자세로 참여했을 뿐이다. 그래도 어렸으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린 것도 잠시, 사춘기의 폭풍은 나를 피해가지 않았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뒤에 폐허 속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문득 내 자신이 외롭고 게으르고 토실토실한 청소년으로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외면해왔지만 그때 내게는 엄마와 동생밖에 없었다. 우리는 서로 정말 달랐지만 그래도 가족이라는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던 셈이다. 그 뒤 몇 년 간은 가족들과 함께 일하고, 책 읽으며 공부하고, 지긋지긋하게 싸우면서 보냈다. 지금 돌아보면 얼핏 고독한 것 같으면서도 알차고 즐거운 시간들이 많았던 것 같다.
 
지금은 대학에 가보고 싶어서 수학과 물리학 등을 혼자 공부하고 있다. ‘대학은 취업을 위한 학원으로 변한 지 오래고 수업의 질에 비해 등록금은 끔찍스럽게 비싸다. 스펙 경쟁은 하늘을 찌르지만 정작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인 건 아니다’라는 말은 주변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하지만 이 말 안에는 내가 직접 경험한 현실이 전혀 없기 때문에, 열 번 말을 듣느니 차라리 한 번 경험해 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 이것저것 교양만 쌓는 공부가 아닌, 뭔가 목적을 가지고 체계적인 공부를 꼭 해보고 싶었다. 그런 바람을 표현한 순간부터 엄마와의 은근한 신경전이 시작됐다. 엄마는 대학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을 믿기 때문에 아직도 탐탁지 않아 한다. 아직 어리고 말랑말랑한 머리를 가진 내가 대학 같은 거대기관에 무작정 들어갔다가는 시스템의 노예가 될 가능성이 많다나 뭐라나. 일단 나는 그럴 리 없다고 반박하면서(과연?) 결심대로 밀고 나가려 한다.
 
용돈을 벌기 위한 나의 투쟁기 

▲ 과수원 배 봉지 싸기, 밤 줍기, 식당 서빙과 설거지, 기타 연주 등으로 용돈을 마련했다.  ©여연 
 
집안의 독재자인 엄마는 예전부터 개인적인 용도의 돈은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한창 외모에 신경이 쓰이고 돈 쓸 일이 많아지자 나는 어떻게든 알아서 돈을 마련해야 했다.
 
처음에는 아는 분의 유기농 과수원에서 배 봉지 싸는 일을 몇 년 간 매년 봄마다 했다. 조금 더 자란 뒤에는 잠깐이지만 어린이 집에서 보조교사로도 일해보고, 면소재지에 있는 횟집에서 하루 열 두 시간씩 설거지와 서빙을 하기도 했다. 그 일을 하면서 식당이 얼마나 환경에 해악을 끼치는 공간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결국 횟집 일은 견디지 못하고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기타를 배웠을 땐 두어 번 알음알음으로 어딘가에서 연주를 해서 10만원, 20만원씩 돈을 벌기도 했다. 작년에는 근처로 귀농하신 분의 밤산에서 한 달 가까이 밤을 주워 오랜만에 목돈을 좀 벌었다.
 
성인이 되지 않은 상태로 직접 돈을 버는 게 쉽지는 않았다. 가난한 엄마를 만나 사고 싶은 물건들을 팍팍 사지도 못하고 생고생을 한다고 억울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일이든 잘 해낼 수 있도록 미리 연습할 수 있어 좋았다고 생각한다. 독립심과 자립심(그리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기르는 데 특히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스스로 ‘생활청소년’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어디 가면 괜히 고개를 높이 들고 다닌다.
 
유럽여행, 세상을 보는 시선이 변하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에서 주워들은 건 많아서, 아는 척하는 거에 비해 실제 행동에는 모순이 많았던 나에게 작년 여름에 유럽을 홀로 여행했던 경험은 어떤 전환점이라고 할만하다.
 
독일에서 공부하시는 엄마 후배 댁을 베이스캠프 삼아 약간의 독일어도 배우고, 남는 시간에는 자유롭게 유럽 여기저기를 여행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농번기에 농사도 빼먹고 혼자 간 여행이었기에, 가족들에게 미안해서 아무것도 놓치지 않고 경험하려고 더 바짝 긴장한 상태로 다닐 수 있었다.

▲ 작년 여름, 유럽을 홀로 여행했던 경험은 인생에 어떤 전환점을 가져왔다.   ©여연 
 
유럽에서 나는, 돈을 아끼기 위해 걷고, 현지의 카풀(car pool) 제도를 이용하고, 가장 싼 호스텔에서 빵과 우유로 끼니를 때우면서 그토록 동경했던 미술관과 자연사 박물관, 오래된 성당 등을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앞으로 내가 어떤 20대를 보내고 싶은 건지 처음으로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서툴고 실수투성이인, 여행이 아니라 고행에 가까운 나날들이었지만 행복했다. 한국과 다른 사회의 모습을 살짝 엿볼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었다.
 
물론 내가 어린 여행자로서 고작 몇 달 동안 본 독일 사회의 모습이 일면일 뿐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곳 사회에도 깊이 들어갈수록 다양한 문제점들이 분명 존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도심 한가운데에 울창한 나무로 가득한 푸른 숲이 있다는 점, 차보다 자전거를 더 배려하는 사람들, 지역마다 유기농산물 가게가 곳곳에 있다는 점 등이 일종의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세와 전기세, 인건비가 워낙 비싸다 보니 마구 낭비해도 된다고 여기지 않고 소중히 쓰는 습관이 들어있는 모습은 말 그대로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정부의 태도와 사회적인 인식이었다. 내가 유럽에 가기 몇 달 전에 일본 후쿠시마에서 원전 사고가 터졌는데, 그 심각한 사고에 대한 한국과 독일의 대응 태도가 너무나도 달라서 굉장히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어쩜 저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하고 궁금해 하는 찰나, 원전 폐지 결정에 상당한 역할을 한 ‘녹색당’이라는 정당의 이름을 들었다. 흥미를 가지고 당 이념과 창당 역사 같은 걸 조금씩 찾아보면서, 녹색당이 만들어질 당시의 독일의 상황과 지금의 한국이 어떤 면에서 상당히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때 한국이야말로 녹색당이 간절히 필요한 나라라고 확신했다.
 
여행을 끝나고 돌아와서 뒤늦게야 한국 녹색당의 창당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내가 먼저 나서서 당원 가입을 했다. 난생 처음으로 해보는 일이었기에 가슴 깊이 뿌듯했다. 녹색당에 대단히 많은 걸 기대해서가 아니다. 드디어 이 나라에서도 이런 당이 생길 수 있을 만큼 사회적인 인식이 충분해졌구나, 하는 감동에서였다.
 
지금도 시민들의 의식수준을 차근차근 높여나갈 수 있는 정당이 있다면 그건 녹색당일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녹색당 창당과 비슷한 시기에 나도 환경이나 사회적인 문제들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더 친근감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또래 10대들과 마주칠 때 드는 고민

▲ 빼곡하게 다양한 책들이 쌓여있는 여연의 집 서재  
 
원한 것도 아닌데 어찌어찌 살다 보니 내가 또래아이들과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문득 인식하게 되었다.
 
어쩌다가 같은 또래의 10대와 마주치게 되면 멀거니 바라보게 된다. 부모의 돈으로 산 온갖 전자기기에 둘러싸여서 사는 걸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면서, 마주앉아도 서로 얼굴 한 번 들지 않고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그들이 핸드폰도 없는 내 눈에는 모두 안드로메다에서 온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를 외계인으로 생각하느니 차라리 나 자신이 외계에서 왔다고 여기는 게 훨씬 나았다.
 
그러면서 그전까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고민을 시작했다.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자랐지? 시골에서 농사지으면서 촌스럽게 자란 건 내게 있어서 행운일까, 아님 불운일까? 글로 쓰고 나니 우스운 고민이지만, 나름 진지하다. 또래들과 어울리기가 힘들어졌다는 점에서는 불운으로 보이는 반면에, 자유의 맛을 보았다는 점에서는 행운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살아온 환경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은 나는 과연 어떤 인간성을 가진 사람인가? 사람은 교육의 산물인 걸까, 아니면 성격과 재능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걸까? 밭에서 풀을 매면서 머리로는 나름 열심히 이런 고민들을 한다. 아직은 워낙 생각의 폭이 좁아서 만족스런 결론은 내리지 못했다.
 
이십 대에는 무슨 일이 펼쳐질까

▲ 인연을 맺은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공부를 해보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 하필 자연과학을 선택한 첫째 이유는 재미있어서였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건 간에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사고방식은 필요하리라는 계산(?)도 있었던 듯하다.
 
20대에는 다양한 NGO단체에서 상근자로 일해보고 싶은데, 어떤 단체라도 그냥 막무가내로 뛰어들고 보는 게 아니라 탄탄한 배움을 바닥에 깔고 시작하고 싶다. 특히 내가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핵발전소 문제나 에너지 문제, 전 세계적인 생물 다양성 파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이 알수록 괜찮은 활동가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환경운동가에게 있어서 과학적인 관점을 가지는 일이 갈수록 중요해지리라고 믿는다.
 
그 밖에도 시멘트 같은 인공물을 사용하지 않고 내가 살 집을 직접 지어보고 싶다거나, 현대문명에 대해서 성찰하는 SF소설을 써보고 싶다거나 하는 꿈이 있다. 어떤 일을 하건 편안한 삶에 안주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쉽고 평탄한 길보다는 어려운 길을 낑낑거리면서 해쳐나가는 것이 힘든 만큼 더 재미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는 혹독하더라도 남에게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어려운 일이지만 인간관계에서 솔직담백하고 싶다. 살면서 만나게 될 어려움을 미리부터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놓아주는 걸 목표로 삼으면서 살아가고 싶다. 꼭 필요하지 않은 소유물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도 인간성과 가치관은 결코 놓아버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무엇보다 머리와 몸을 골고루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느 한 쪽만 불균형하게 뛰어나거나 모자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땀 흘리는 노동을 마음으로 존중하면서 즐겁게 해내고,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을 기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공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학교라는 제도 바깥에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했던 내 십대는 치열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내년이면 나는 스무 살이 된다. 20대에는 과연 무슨 일이 펼쳐지게 될까. 어떤 사람들과 함께 무엇을 경험하게 될까. 궁금하다.   (여연)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인터넷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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